오랫만에 영어도서들을 둘러보다가 어느 책을 발견했다.
투박한 제목이 먼저 나의 시선을 끌었고, 단순한 디자인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영어지문을 독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말과 영어의 어순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우리말은 ‘주어 + 목적어 + 동사’ 순서인 데 비해
영어는 ‘주어 + 동사 + 목적어’ 순서이기 때문에,
영어 한 문장을 우리말 어순처럼 해석하려면
한 문장을 다 읽고, 동사 뒤에 나오는 목적어를 찾아서 먼저 해석한 후,
동사를 나중에 해석하게 된다.짧은 문장들로만 구성된 지문은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복잡하고 긴 문장들로 구성된 지문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지문을 한두 번 읽어서는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뜻은 알고 있는데
문장 전체로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상황,
특히 시험 문제로서 제한된 짧은 시간에 독해문제를 풀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원하는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워진다.따라서 영어문장을 읽을 때에는
우리말 어순으로 바꾸어 다시 배열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영어어순 그대로 읽으면서 바로바로 해석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이 글의 요지는 영어 문장을 한국어 어순으로 바꾸지 말고,
영어 어순 그대로 읽으며 해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겉으로 보기엔 “영어를 영어답게 이해하자”는 말처럼 들려 논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어를 ‘기계적으로 더 빠르게 처리하는 기술’로만 이해하는
전형적인 ‘한국식 공부방법’이라는 관습적 시각에 갇혀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글은 모국어를 해석의 방해물처럼 취급한다.
영어 어순을 익히기 위해선 한국어 어순을 억눌러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는,
이미 갖고 있는 한국어라는 틀을 바탕으로
영어 구조를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배운다.
예를 들어, 영어의 주어-동사-목적어 구조를 처음 배우는 학습자는
“우리말과 어떤 점이 다르지?”를 비교하며
그 차이를 머릿속에 정리한다.
즉, 모국어는 없애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준선’>이다.
이 과정을 무시하고 무작정 영어 어순에만 집중하라는 건,
마치 계단 없이 이층집으로 뛰어올라가라는 말과 같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 생각에 저자는 아래의 3가지 한국식 입시공부에 뿌리를 둔 학습법을 주장하고 있다.
시험 중심 사고(Test-Oriented Cognition)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를 하나의 ‘시간 안에 정답을 맞혀야 하는 문제’로 설정하고 있다.
언어 자체에 대한 감각, 탐구, 사고의 확장은 관심 바깥이다.
그저 긴 문장을 어떻게 빠르게 처리하느냐에 초점이 있다.
“우리말 어순으로 해석하면 시험 시간 안에 풀기 어렵다.”
→ 여기서 해석은 목적이 아니다.
정답에 도달하기 위한 우회로일 뿐이다.
이 사고방식은 1990~2000년대 한국식 입시교육의 전형이다.
영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점수를 올리기 위해 단기간에 몰입하는 과목’이고,
그 시선 안에서 이 글이 하는 말들은 익숙할 수밖에 없다.
속도 우선주의(Speed Over Depth)
직독직해를 주장하는 글들 대부분은 ‘빠르게 읽는 법’을 강조한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전제다.
이들은 마치,
‘기본적인 문장 이해는 이미 된 상태’에서의 훈련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실의 학습자들 상당수는
문장을 정확히 구조화하거나, 의미 흐름을 따라가는 법조차 익히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도 속도부터 강요한다면?
결국 의미는 지워지고, 형태만 스치듯 지나가는 독해가 반복된다.
이건 전형적인 한국식 ‘형태 암기 + 스킬 반복’ 모델이다.
빠르게 읽되, 결국 깊게 이해한 적은 없는 모델 말이다.
모국어 억압 전략(L1 Suppression Strategy)
이 글은 “우리말 어순으로 끌려가지 마라”고 말한다.
이 말 뒤엔 오래된 믿음이 숨어 있다.
한국어식 사고를 억눌러야 영어를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학도, 인지과학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정반대다.
모국어의 구조와 개념 체계가 충분히 정립되어 있을 때,
새로운 언어의 문장도 비교하고 대응하면서 더 안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식 영어 교육에서는,
모국어는 종종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된다.
“말 나오는 대로 들어, 어순 외워, 직감으로 받아들여.”
→ 이건 사고의 흐름을 자르기 위한 기술 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학습자는
결국, 자기 언어 없이 남의 언어를 따라 말하는 사람이 된다.